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랭 들롱 (문단 편집) == 생애 == 1935년 11월 8일 프랑스 오드센 주 소에서 태어났다. 4살 때 부모가 이혼했고, 재혼한 어머니와 살았으나 계부와 잦은 갈등을 빚었다. 유복하지 못했던 유년기 때문인지 가톨릭 학교를 다녔지만 행실 불량으로 여러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개중에는 신학에 대한 들롱의 적성을 알아본 교사들이 들롱에게 사제직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들롱은 14살에 학교를 떠나 짧은 기간 동안 계부의 정육점에서 일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lain DELON en Indochine.jpg|width=100%]]}}}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파병 당시 [[사이공]] 해군기지 경비중대 무전병으로 복무 중인 사진. 가장 중앙에 앉은 젊은 군인이 알랭 들롱이다. 17세에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 통신학교 기간병으로 근무 중 절도죄로 불명예 전역과 군 복무 연장의 선택에 놓이자 복무 연장을 택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인 1953~54년에는 베트남 사이공 해군기지 경비중대 무전병으로 1년간 파병되었다. 파병 기간 중 부대 [[지프]]를 훔쳐 근무지를 무단이탈하여 영외로 여행을 떠났다가 운전 미숙으로 차량을 강물에 빠뜨린 혐의로 체포되어 11개월간 군 교도소 수감 후 해군 상병(Matelot de 1re classe)을 끝으로 해군에서 불명예 전역했다. 들롱은 군에서 수감 기간 포함 총 4년간 복무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외인부대|외인부대]]의 낙하산 부대원 역할을 연기한 적이 있어 실제로 전쟁에 참전한 외인부대 낙하산병이나 해군 특공대 출신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퍼져 있기도 했지만, 실은 위에 나오듯 해군 육전부대인 Fusiliers marins 출신.[* 프랑스 해군의 Fusiliers marins는 해군 육상 전투부대로 미국의 해병대에 해당하는 조직.] 불명예 제대 후 세계 각지를 떠돌다 [[1956년]] 프랑스로 돌아온 들롱은 돈을 벌기 위해 파리에서 웨이터, 짐꾼, 비서, 점원 등 갖은 잡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한 때 갱단에 있었다는 소문도 있다. 알랭 들롱은 사실 외모에 대한 찬사 외에도 [[퇴폐|인상이 그리 밝지 않아 어딘가 범죄형의 분위기를 띈다는 평도 함께 받기도 한다.]]] 이때 여배우 브리지트 오버와 친분을 쌓았고 이후 오버와 함께 [[칸 영화제]]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미국의 영화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1902~1965)에게 발탁되었다. 스크린 테스트 후 셀즈닉은 들롱에게 영어 교육을 제공하고 계약을 제안했다. 하지만 파리로 돌아온 들롱은 프랑스의 이브 알레그레 감독을 만나 고국에서 경력을 쌓으라는 충고를 받아들이고 셀즈닉과의 계약을 파기한 후 알레그레 감독의 영화 1957년 <여자가 다가올 때>로 데뷔했다.[* 정작 들롱은 미국에서 경력은 잘 안 풀렸다. 진출 후에도 레드 선 같은 이색작에도 출연했지만 미국에서 자체적인 인기는 끌지 못했다.] 이후 <사랑은 오직 한 길>, <아가씨 손길을 부드럽게> 등의 로맨스 영화를 통해 인기를 얻고, 공전의 히트작 <[[태양은 가득히(영화)|태양은 가득히]]>로 세계적인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이후에도 수없이 리메이크된 이 영화에서 알랭 들롱은 위험한 남자 "톰 리플리" 역을 맡아 다부진 몸과 매혹적인 눈빛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알랭 들롱의 이름값 때문에 소개돼서 히트친 영화도 있을 정도였다.[* 대표적으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태양은 외로워가 있다. 한국에서 흥행은 했고 주제가도 유행했지만, 내용 자체는 히트치기에는 좀 난해한 영화였다. 순전히 알랭 들롱이 나온다는 이유로 보러 갔던 관객들이 많았던 편.] 다만 연기력에 대해선 의견이 갈리는 편인데 입이 떡 벌어질만한 거장 감독들의 작품들로 꽉 채워진 필모그래피인데도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적은 없다. 동시대 알랭 들롱과 함께 활동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스타들이 상을 휩쓸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수상 실적은 저조하고 본국인 프랑스의 대표적 시상식인 세자르에서도 전성기가 지난 뒤 중년의 나이에 남우주연상을 1회 수상한 것이 전부. 외모와 인기때문에 연기력이 저평가되었다고 재평가하는 의견이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umblr_odwl3mzHTz1r23joco1_400.gif|width=100%]]}}} || || '''{{{#FFFFFF 영화 《태양은 가득히》 중}}}''' || 서늘하면서 퇴폐적인 특유의 매력으로 이후에는 주로 [[느와르]]에 출연했으며 독보적인 외모로 "프렌치 느와르"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푹 눌러쓴 [[중절모]], 깃을 세운 [[트렌치 코트]]를 입고 범죄자를 주로 연기했으며 이런 모습은 <[[한밤의 암살자]]>, <시실리안>, <암흑가의 두 사람>, <암흑가의 세 사람>, <볼사리노>, <고독한 추적> 등에서 볼 수 있다. 워낙 범죄자나 악역을 많이 맡다 보니 죽는 역할도 꽤 많다. 위 느와르 영화만으로 [[사망전대]] 멤버. 아마 어렸을 적 질풍노도의 시기 때문인지 들롱은 [[하류인생]]을 주로 연기했는데 실제로 젊은 시절 많은 굴곡을 경험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책에 "알랭 들롱은 미남이다. 그러나 왠지 풍기는 분위기가 천하다. 그런 만큼 밑바닥 인생을 연기하면 매력이 살아난다"라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열심히 영어를 배워가며 시도한 미국 진출이 실패한 이후 프랑스로 복귀했으며, 프랑스 영화계와 다른 할리우드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1991년]]에 영화 <[[카사노바]]>에서 나이가 든 [[자코모 카사노바]] 역을 맡았는데 당시 최고 개런티급인 7백만 프랑을 받았다. 이를 두고 프랑스 언론은 한물간 배우에게 무지막지한 개런티를 들인다며 제작자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흥행 역시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이후 1998년 <절반의 기회>를 끝으로 "프랑스 영화는 죽었다"고 선언한 들롱은 영화 출연보다는 영화 제작과 복싱 프로모터로 더 활약했다. [[1999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여 현재는 [[스위스]]에서 살고 있다. 당시 로망드 TV에 출연하여 귀화 및 이민 동기를 밝혔는데 스위스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재산 보호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부와 프랑스 사회 전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2008년]]에 <아스테릭스 : 미션 올림픽 게임>에서 백발이 성성한 시저 역으로 오랜만에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었다. [[2017년]] [[5월 9일]](현지시간)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421&aid=0002725733|영화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2019년 [[칸 영화제]]에서 공로상 격인 [[명예]] [[황금종려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용납 가능한 범주를 넘은 막장 사생활로 인해 수상 반대 여론이 거세다. [[온라인]]에서 수상을 철회하라는 청원에 2만 5천명 이상이 서명했으나 2017년 5월 19일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시상자는 그의 딸 아누슈카 들롱. 알랭 들롱은 "인생의 끝에 다다랐다고 느끼는 요즘이라 사후에 받을 상을 지금 받는 것 같다"며 드물게 눈물을 보였다. 2019년 8월, [[뇌졸중]]으로 입원해 수술을 받았고 현재 회복하여 퇴원하였다. 2021년 초 딸 아누슈카 들롱이 알린 바에 의하면 건강히 지낸다는 듯. 은퇴 영화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뇌졸중 투병 전에 [[쥘리에트 비노슈]]가 출연하는 은퇴 영화가 계획되었으나 무산된 적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